
TSN KOREA 스포팅뉴스 (The Sporting News Korea) 최민준 기자 | 스포츠에서 ‘경쟁자이자 동료’라는 말만큼 묘한 관계도 없다. 특히 개인 종목과 단체 종목이 공존하는 쇼트트랙에서는 팀워크와 경쟁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을 이끄는 최민정과 김길리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
김길리는 어린 시절부터 최민정을 보며 꿈을 키웠다. 세계 정상급 선수로 군림하던 최민정의 플레이 스타일을 따라 하며 성장했고, 결국 같은 소속팀 성남시청에 입단했다. 하지만 존경하던 선배와의 관계는 단순한 선후배를 넘어 어느새 선의의 경쟁 구도로 바뀌었다.

두 개의 궤적, 하나의 목표
최민정은 2023-2024시즌을 건너뛰었다. 스케이트 장비를 바꾸고, 개인 훈련을 통해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사이 김길리는 여자 쇼트트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최민정이 없는 무대에서 월드컵 시리즈를 지배하며 세계 랭킹 1위에 올랐고, ‘황금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서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2025년, 최민정이 돌아왔다. 복귀와 동시에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에서 맞붙었고,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서로를 넘어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경기를 앞두고 김길리는 5관왕을 목표로 삼았다. 계주뿐만 아니라 500m, 1,000m, 1,500m 개인전에서도 모두 금메달을 따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들은 최민정은 웃으며 “좋게 생각하겠다”라고 답했다. 언뜻 가볍게 넘기는 듯했지만, 그 말 속에는 경쟁자로서의 긴장감과 더 높은 곳을 향한 각오가 스며 있었다.

"길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스포츠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 500m, 1000m, 혼성 2,0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최민정은 대회 4관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 3,000m 계주에서 선두로 달리던 김길리가 중국 선수와의 충돌로 넘어지면서 메달을 놓쳤다.
그 순간, 최민정은 승패보다 후배의 마음을 먼저 챙겼다. “(김)길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도 수많은 부담감을 짊어지고 달려왔기에, 김길리가 느꼈을 실망과 죄책감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확신했다. “김길리는 한국 쇼트트랙을 이끌어갈 선수다. 이번 경험이 그를 더 성장시킬 것이다.”
경기의 승패를 넘어, 같은 길을 걷는 선수로서 후배를 다독이는 모습. 그것이야말로 스포츠에서 ‘진짜 강자’가 보여줄 수 있는 태도였다.

밀라노를 향한 '동반 질주'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이 끝나자 두 선수의 시선은 다시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을 향했다. 김길리는 “이제 가장 큰 목표는 올림픽”이라며 선발전과 세계선수권을 통해 부족한 점을 채우겠다고 다짐했다.
최민정 또한 올림픽을 향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새로운 전략을 시도했다. 기존의 ‘뒷심 추월’ 스타일에서 벗어나, 초반부터 가속을 붙이는 방식으로 변화를 줬다. 선수들의 기량이 평준화된 만큼, 승리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혁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번 동계아시안게임을 통해 경쟁력이 충분하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그 말 속에는 단순한 만족이 아닌, 앞으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빙판 위의 경쟁자이자 동반자
빙판 위에서 두 선수는 치열하게 맞붙는다. 하지만 경기장을 벗어나면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동료다. 스포츠에서 진정한 경쟁자는 단순히 승패를 가리는 상대가 아니다. 함께 성장하고, 서로를 자극하며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최민정과 김길리는 단순한 선후배가 아니다. 서로를 넘어서야 하는 경쟁자이면서,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을 함께 이끌어가는 동반자다.

2026년 밀라노의 빙판에서, 두 선수는 다시 한 번 최고의 무대에서 격돌할 것이다. 그날, 대한민국 쇼트트랙 팬들은 두 사람이 펼치는 한 치의 양보 없는 승부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깊은 존중과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